몰락한 부르조아 문인이 선택한 삶에 관한 이야기!
동경에서 유학하던 아들은 졸업을 일 년 앞두고 학업을 그만두고 귀경합니다.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농촌에 관한 글을 써서 신진작가로 신문과 잡지에 이름을 올리는데...
가족들은 유명해진 아들에게 큰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까요?
그의 원대한 꿈은 일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까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할 수 있을지...
* 이 작품은 1935년 “백광”을 통해 소개 되었습니다.
* 이 작품의 제목인 고절(苦節)은 어떤 곤란(困難)한 일에도 굽히지 아니하는 굳은 절개(節槪ㆍ節介)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용묵 (1904 ~ 1961)
소설가.
본명은 하태용(河泰鏞)으로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휘문고보를 거쳐 1928년 일본에 건너가 토요대(東洋大學) 동양학과에 다녔다.
데뷔는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로 했고, 1925년『생장』에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되고 부터이고 1928년『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蛛)]를, 1935년『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를 발표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고, 1943년에는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었다.
광복 직후에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사망하였다.
계용묵은 [최서방], [인두지주] 등에서 현실주의적‧경향파적인 작품세계를 보였지만 [백치아다다] 발표를 통해 인생파적‧예술파적 작품세계로 옮아간 후, 예술의 미적 창조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