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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거룩한 이의 죽음

감동의 한국문학단편시리즈 161

동학 창시자, 최제우 선생의 죽음 이야기! 김씨는 까치 소리를 들으며 저녁이 된 것을 알고 기도하며 저녁을 준비합니다. 남편 박 대여가 들어오면서 동학선생님이 이곳에 오신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선생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선생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청소도 하고 먹을 것도 준비하고 주무실 방도 따뜻하게 준비하고... 부부는 함께 동학선생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도 올립니다. 과연 동학선생님은 이 부부의 소망처럼 이 집에서 편히 쉬실 수 있을까요?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동학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립니다. 우리도 동학선생님을 만나 봬야겠습니다. <동학에 관한 이해> 조선후기 인내천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 최제우. 그는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
동학 창시자, 최제우 선생의 죽음 이야기!

김씨는 까치 소리를 들으며 저녁이 된 것을 알고 기도하며 저녁을 준비합니다.
남편 박 대여가 들어오면서 동학선생님이 이곳에 오신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선생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선생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청소도 하고 먹을 것도 준비하고 주무실 방도 따뜻하게 준비하고...
부부는 함께 동학선생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도 올립니다.

과연 동학선생님은 이 부부의 소망처럼 이 집에서 편히 쉬실 수 있을까요?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동학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립니다.
우리도 동학선생님을 만나 봬야겠습니다.

<동학에 관한 이해>
조선후기 인내천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 최제우.

그는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어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論學文)」·「안심가(安心歌)」·「교훈가」·「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습니다.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소를 확보하였습니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광수 (1892(고종 29) ~ 1950)
조선,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상가,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나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집에서 자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입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 를 발표 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했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하여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하다 귀국해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습니다.
1940년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고,「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는 등 다양한 친일행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고, 1947년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5월에 [도산 안창호] 를, 6월에는 [꿈]을 출간했습니다.

1949년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했고, 2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후 1962년 2월 전기 [춘원 이광수], 1963년 11월 [이광수 전집]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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