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몸으로 손자를 돌보는 할아버지 이야기!
무더운 여름, 할아버지가 젖 달라고 보채는 손자를 업고 논으로 갑니다.
평생을 다니던 길인데 이제는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없고 등에서 보채는 손자의 무게로 쉽게 며느리에게 갈 수가 없습니다.
농사일이 바쁜 아들내외를 위해 귀여운 손자를 봐주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무사히 며느리에게 손자를 데려갈 수 있을까요?
농사일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요?
또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할아버지를 만나봐야겠습니다.
* 묘예 (苗裔)의 뜻: 여러 대를 걸친 먼 후대(後代)의 자손(子孫)
계용묵 (1904 ~ 1961)
소설가.
본명은 하태용(河泰鏞)으로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휘문고보를 거쳐 1928년 일본에 건너가 토요대(東洋大學) 동양학과에 다녔다.
데뷔는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로 했고, 1925년『생장』에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되고 부터이고 1928년『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蛛)]를, 1935년『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를 발표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고, 1943년에는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었다.
광복 직후에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사망하였다.
계용묵은 [최서방], [인두지주] 등에서 현실주의적‧경향파적인 작품세계를 보였지만 [백치아다다] 발표를 통해 인생파적‧예술파적 작품세계로 옮아간 후, 예술의 미적 창조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