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못 낳은 정조 대왕을 위한 충신의 선택!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손자가 정조 대왕이 되었습니다.
고모 화평옹주(和平翁主)가 매사에 동생인 사도세자를 옹호하여 아버지 영조의 노염을 풀기위해 노력을 하였고, 아버지 사도세자도 누님을 하늘 아래에는 더 없는 사람으로 사모하고 의지하여 내 지하에 간들 어이 누님의 은의를 잊겠는가 하는 말을 항시 해왔습니다.
정조 대왕은 고모의 남편인 박명원을 특별히 신임하였습니다.
그는 인격이 고아한 사람이라 왕이 자신을 신임한다는 그 권세를 남용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일찍이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한 분 두셨지만 불행히 일찍이 돌아가고 그 후로는 다시 왕자 탄생의 기쁨을 가져 보지 못하셨습니다.
만일 이렇게 지나시다가는 나라의 종사(宗嗣)가 끊일 것을 근심하는 여러 충신들은 널리 빈(嬪) 한 분을 간택해 들이어서 왕자를 탄생하시도록 상감께 권주하였습니다.
박명원 역시 정조 대왕께 빈을 들이라고 청하는데...
정조는 왕의 친척이라 해서 농권코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빈을 간택하기를 싫어했는데...
과연 정조는 박명원의 청을 받아들일까요?
박명원은 어떻게 빈을 선택하여 정조에게 후사를 잇게 할까요?
윤백남 (1888 ~ 1954)
소설가, 극작가 겸 연극영화인
충청남도 공주에서 1888년(고종 25) 태어난 윤백남의 본명은 교중(敎重)입니다.
1904년 일본으로 가 1910년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보성전문 강사로 일했습니다.
1912년 극단 문수성(文秀星)을 조직하여 제1회 공연을 원각사(圓覺社)에서 가졌고,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1916년 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예원(藝苑)》을 창간하였고, 극단 예성좌(藝星座)를 조직하여 초연을 단성사(團成社)에서 가졌습니다. 또한, 1917년 백남(白南)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제작했습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 [대도전(大盜傳)]을 발표했으며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22년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해 자신의 희곡 [등대지기][기연(奇緣)] [제야의 종소리] 등과 번안·번역극 등을 상연했고,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月下)의 맹서]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습니다.
대표작품은 [항우(項羽)] [난아일대기(蘭兒一代記)] [봉화(烽火)] [흑두건(黑頭巾)] [해조곡(海鳥曲)]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 [미수(眉愁)] [낙조(落照)의 노래] [야화(野花)] [조선형정사(朝鮮刑政史)]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