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시절, 나라를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긴박한 움직임!
A씨는 억울하게 악형을 당하고 재산도 모두 빼앗기고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일본으로 들어가 동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는 이러한 억울한 사연을 가진 젊은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원수를 갚고자 교육과 훈련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신분의 격차로 인한 불합리한 처우와 조국을 빼앗으려는 일본의 계략에 이들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이들의 긴박한 삶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 1931년 [동광 (東光)]에 발표되었습니다.
이광수 (1892(고종 29) ~ 1950)
조선,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상가,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나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집에서 자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입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 를 발표 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했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하여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활동하며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하다 귀국해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습니다.
1940년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고,「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는 등 다양한 친일행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고, 1947년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5월에 [도산 안창호] 를, 6월에는 [꿈]을 출간했습니다.
1949년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했고, 2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후 1962년 2월 전기 [춘원 이광수], 1963년 11월 [이광수 전집]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