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전쟁 후, 조부와 어린 동생 곁의 낯선 여인!
내가 열 한 살 때, 추석 쯤 부모를 한꺼번에 여윈 지 이태.
젖먹이 끝에 누이는 남의 집에 가서 살다가 이질에 죽고, 유일하게 남은 어린 누이.
노일전쟁이 터지고, 나는 팔십 가까운 조부와 일곱 살 누이를 두고 서울로 갔습니다.
반년 후, 그들이 이사간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여덟 살 된 어린 누이는 오빠가 왔다고 따뜻한 밥을 차려 옵니다.
밥을 먹으며 보부 엄마라는 낯선 이름을 듣게 됩니다.
과연 그 여인은 누구일까요?
연로한 조부와 어린 누이를 가끔 와서 돌봐 준다는 여인.
그 여인은 왜 이들을 돌보고 있는 건지….
이 여인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 이 작품은 1936년 [사해공론(四海公論)]에 발표되었습니다.
이광수 (1892(고종 29) ~ 1950)
조선,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상가,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나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 를 발표 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했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하여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하다 귀국해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습니다.
1940년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고,「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는 등 다양한 친일행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1947년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도산 안창호] 와 [꿈]을 출간했습니다.
1949년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사망했습니다.